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알렉산드르 솔제니친 (문단 편집) === 중기 === 그러나 그가 친구에게 보낸 편지 중 [[이오시프 스탈린]]의 판단력을 의심하는 내용과 조롱하는 표현[* 수용소군도에 의하면, 스탈린을 '파한(пахан)'이라는 단어로 지칭했다고 한다. 이 단어는 아버지, 두목, 대빵 등의 의미를 담고 있는 비속어이다.]이 문제가 되어 1945년 2월 [[스메르쉬]]에 의해 [[동프로이센]]에서 체포되어 심문을 위해 [[루뱐카]]로 보내졌고, 이 곳에서 [[승리의 날]]을 맞았다. 7월 7일, [[NKVD]]에 의해 8년 형을 선고받고 [[카자흐스탄]]의 예키바스투즈(Екібастұз)[* [[파블로다르]] 인근에 있는 소도시.] [[굴라크]]로 보내졌다. 굴라크에서 일반 죄수들처럼 지내던 중 수학을 잘하는 것이 발견되어 연구원 전용 [[수용소]][* 이런 수용소를 샤라시카(Шарашка)라고 부른다. 당시 [[소련]]의 과학, 기술 분야에서 한가락 했던 [[세르게이 코롤료프|코롤료프]], [[투폴레프]] 등이 바로 이런 곳에서 지냈다. 샤라시카의 분위기는 훨씬 느슨한 편이어서, 다른 일반 죄수들과 같이 '''중노동에 동원'''되지 않았고, 가끔씩 면회가 허용되었다.]에서 지낼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모종의 이유로 수용소 당국과 마찰을 빚으면서 다시 굴라크로 복귀해[* 이때의 경험을 바탕으로 쓴 소설이 제 1원에서(В круге первом)이다.] 석방될 때까지 다시 카자흐스탄의 수용소 [[탄광]]에서 중노동을 해야 했다. 이 생활을 바탕으로 그의 역작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와 [[수용소군도]]를 썼다. 수감 생활이 끝난 후 1953년 3월 2일, [[카자흐스탄]] 남부 비를리크 마을로 추방되어 나흘 뒤 스탈린이 죽었다는 ~~기쁜~~ 소식을 들었다. 그러나 수용소 시절부터 앓던 종양이 도져 이듬해 [[우즈베키스탄]]의 [[타슈켄트]]로 옮겨 치료를 받고[* 이 때의 경험으로 쓴 소설이 '암병동'이다.], 유형지에서 교사 생활을 하였으나 다행히도, [[니키타 흐루쇼프]]의 반 스탈린주의로 그는 1956년에 사면되었고 물리학, 수학 교사로 활동한다. 이어 1960년, 노비 미르(Новый мир)지의 알렉산드르 트바르돕스키(Александр Твардовский)를 만나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의 초안을 작성했다. 1962년 이후 소련 관료제를 비판한 <유익한 사업을 위하여>나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 <제 1원에서> 같은 수용소 생활을 묘사한 작품들을 발표하며 소련 문단에서 주목받는 작가로 부상하는 동시에, 문단에 파문을 일으켰다.[* 그 충격이 어느 정도였나 하면 당시 수용소에서 철 지난 잡지를 통해 솔제니친의 작품을 접한 죄수들이 '''국가가 무슨 이유로 이런 작품이 나오도록 방조했나'''라고 했을 정도다.] 흐루쇼프의 실각과 함께 소련작가동맹에서는 그의 작품에 대한 논쟁이 벌어지기 시작, '''반소 작가'''라고 비난할 정도였다. 심지어 굴라크에서의 노동을 통한 개화를 주장하는 어용 작품과 솔제니친은 사실 죄수가 아니었다는 흑색선전까지 나올 정도였다. 결국 반동으로 찍혀 1969년 11월에는 소련작가동맹에서 쫓겨난다. 1968년 9월, 솔제니친의 <암병동>과 <연옥 1번지>가 [[사미즈다트]] 형태로 유통되었고,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로 1970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하였다. 소련 정부와 소련작가동맹은 이를 좌시하지 않았으며 그의 [[노벨문학상]]을 인정하지 않고 [[보리스 파스테르나크|노벨상 포기]]와 공개 전향, 추방 중 하나를 선택하도록 요구했다.[* 솔제니친은 노벨상 포기는 생각할 수 없었기 때문에 소련 주재 스웨덴 대사관에서 수상하는 안을 제시했지만 소련 당국은 당연히 '''거부'''했다.] 하지만 솔제니친은 한번 [[스웨덴]]으로 출국하면 다시는 소련에 돌아가지 못할 것을 우려하여 [[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aver?articleId=1970112800209204010&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70-11-28&officeId=00020&pageNo=4&printNo=15121&publishType=00020|시상식에 참석하지 않았다]]. 그의 우려대로 이때 소련 공산당 정치국은 솔제니친을 처리하기 위한 회의를 소집했었다. [[유리 안드로포프]]는 솔제니친을 스웨덴에 보내서 노벨상을 받게 하고 대신에 소련 국적을 박탈해서 다신 돌아오지 못하게 하자는 방법을 제안했다.[* 스탈린 이후 소련은 [[레프 트로츠키|'''심각할 정도로 체제를 위협한 게 아니라면''']] 웬만해서는 기를 쓰고 죽이려 하지는 않았으며 자국 내 반체제인사의 이주 허가를 내주거나, 미국에서 잡힌 스파이와 맞바꾸는 식으로 내보내 평생 소련 땅을 못 밟게 하는 방법을 사용했다. 이 과정은 2015년 [[톰 행크스]]가 주연한 [[영화]] [[스파이 브릿지]]에도 잘 묘사되어 있다.] 그러나 내무장관 [[https://en.wikipedia.org/wiki/Nikolai_Shchelokov|니콜라이 셸로코프]]가 추방에 반대하였다. 참고로 지금까지 러시아 국적으로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4명의 작가([[부닌]], 파스테르나크, 숄로호프, 솔제니친)중에 소련 당국이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밀어준 작가는 숄로호프 뿐이다. 부닌은 [[적백내전]] 때 공산당이 싫어 조국을 등지고 프랑스로 떠난 망명자였고, 파스테르나크와 솔제니친은 소련 체제를 비판적으로 서술했다는 이유로 모진 탄압을 받았다. 한편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가 호응을 얻기 전인 1958년부터 굴라크에서 자신이 겪은 일들과 수용소 당국의 현실, 재소자 227명의 사연과 증언들을 정리해 소련 수용소 시스템에 대해 구체적으로 저술하기 시작했다. 죽음을 각오하고 쓴 원고를 지키기 위해 매우 조심했지만 1969년부터 소문을 들은 [[KGB]]의 주목을 받았고 1973년 8월 결국 KGB에 의해 솔제니친의 원고가 발각되자 남은 원고들을 서방으로 밀반출시켰다. 이 원고가 1973년 12월에 [[프랑스]]에서 처음 발표된 <[[수용소 군도]]> 제1부였다. 1972년 9월, 닉슨-브레즈네프 정상회담 개최 직전 소련 정치국은 다시 솔제니친 문제를 논의했고 안드로포프와 [[알렉세이 코시긴]]이 솔제니친 추방을 주장했으나 결국 정치국은 솔제니친에게 아무런 제재도 가하지 않았다. 하지만 솔제니친은 소련 지도부에 마르크스-레닌주의를 버리고 러시아 정교회 신앙을 통해 나라를 다스리라는 서한을 보냄으로[* 여기서도 알수 있듯 솔제니친은 러시아의 전통을 중시하는 러시아식 보수주의자였다. ] 정면 도전장을 내밀었고, <수용소 군도>의 존재는 기어이 1974년에 서방에까지 알려졌다. 발칵 뒤집힌 소련 정치국은 일단 1974년 2월 13일 솔제니친을 일단 투옥시키고 어떻게 처리할지 논쟁을 벌인다. 안드로프프는 다시 솔제니친을 추방하자고 제안했으나 브레즈네프는 끝까지 이를 거절했다. 정치국은 폭발했고 안드로포프와 그로미코가 솔제니친을 추방하자고 제안한 것에 대해서 소련 지도부는 너무 물러터진 조치라고 반발하고 나섰다. 니콜라이 포드고로니는 마오쩌둥은 공개총살도 불사하는데 언제부터 소련이 이렇게 물러진거냐고 솔제니친을 체포하라고 요구했고 코시긴은 솔제니친을 조리돌린 후 시베리아 광산에 보내서 썩게 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서방 기자놈들은 추운 시베리아까지 가서 취재하진 않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안드로포프는 솔제니친을 더 이상 내버려뒀다간 국제관계가 아니라 국내가 끝장날 판이라고 브레즈네프에게 경고했고 재빨리 [[빌리 브란트]]로부터 솔제니친을 받아주겠다는 약속을 받아냈다. 마침내 브레즈네프는 솔제니친의 추방에 동의하고 솔제니친을 서독으로 추방했다. 솔제니친은 그렇게 소련에서 쫓겨나 서독을 거쳐 [[스위스]] [[취리히]]에 체류하다가, 마침내 1976년 10월 [[미국]]의 [[버몬트]]에서 [[은둔|은거 생활]]을 시작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